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율곡이 선조에게 제시한 개혁구상은 '위로부터·정치 개혁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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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혁의 성공 조건은?

◇율곡선생이 1569년 9월에 선조에게 제출한 동호문답을 저술한 독서당터. 현재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옥수극동아파트 정문 화단에 위치해 있다. 독서당은 조선시대 관료들이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온전히 글을 읽고 공부하게 한 제도이자 기구다. 지금의 대학교수 안식년과 비슷하다. 학문을 좋아한 군주였던 세종은 관료들이 집에서 글을 읽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도입한다. 이를 확대 발전시켜 중종 때인 1517년 별도의 공부 공간으로 만든 것이 '독서당'이다. 동호(東湖)나루 근처에 있다고 해서 '동호 독서당'으로도 불렸다. 율곡 이이도 이곳에서 공부했는데 그가 왕도정치를 논한 '동호문답'은 일종의 연구과제였다. 서울=권태명기자

1569년 선조 2년 제출한 '동호문답'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어

국왕이 의지 갖고 문제적 현실 바꿀 '진짜 선비' 등용이 전제

이를 통해 세금제도 개선…백성의 도덕적 교화는 장기 과제로

선조와 재상들 주저…동조 세력도 우선순위·방향 놓고 이견

교육 개혁, 언론 개혁, 경제 개혁. 각종 언론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들이다. 이처럼 요즘 시대에 개혁이란 말은 너무나 흔해 우리는 이를 친근하게 여기며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현재의 상황을 유지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하는 태도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일반적인 경향이다. 즉, 근래의 유행어로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서 보수가 '디폴트(Default·기본값)'이며, 개혁이야말로 예외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율곡 역시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이전의 습속을 편안히 여기고, 관례를 그대로 따르려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드넓은 강을 맨몸으로 건널 정도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개혁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말은 경장(更張)이었다. 율곡은 경장이 당대 조선의 시대 과제(時務)임을 역설했다. 국가를 새롭게 세우는 창업(創業), 각종 시스템을 만들어 잘 지키는 수성(守成)의 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조선은 경장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다. 율곡은 경장이 절실한 당시의 조선 상황을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즐겼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유가 '다 쓰러져 가는 집'이었다. 그 집은 지금 기와가 깨지고 대들보는 주저앉아, 시급히 수리를 하지 않으면 무너질 지경이었다. 또 하나의 비유는 '기절했다가 갓 깨어난 사람'이었다. 아직 맥이 안정되지 않았고 원기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둘러 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능력 있는 목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무슨 약을 쓸지 몰라 손을 놓고만 있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율곡의 개혁 구상은 1569년(선조 2년) 9월에 제출한 '동호문답'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명종의 3년상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려는 국왕 선조에게, 이이는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개혁의 성공을 위한 필수이자 선결 조건은 군주와 재상의 의기투합이었다. 다시 말해,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 개혁 의지를 가지고 최고위 관료인 재상에 '진짜 선비(眞儒)'를 등용해야 했다. '진짜 선비'란 삼대지치(三代之治)로 표상되는 유교의 이상(理想)을 그저 꿈으로만 치부하지 않는 인간형을 의미했다.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문제적 현실을 바꾸려는 자들이었다. 그런 다음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관료 조직에 충원하고, 각종 세금 제도의 개혁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켜야 했다. 백성들의 도덕적 교화는 최종 목표이자 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율곡의 개혁 구상은 한마디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위로부터의 강제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책임의 무게도 크다는 의미였다.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사사로운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기보다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만언봉사'에서 율곡은 말한다. 임금과 신료들의 할 일은 오로지 민생을 위하는 것이다! 또 '위로부터의 개혁'은 정치 개혁이 선행돼야 민생 개혁도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율곡은 '진짜 선비'가 조정에 진출해 확실하게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야 개혁도 가능하리라 보았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진짜 선비'가 정치적으로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멀리는 중국이 한나라 때의 당고(黨錮)의 화가 그러했고, 가까이는 중종대 기묘사림이 그러했다.

하지만 국왕 선조는 변화에, 개혁에 주저했다. 이는 당대의 재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변화와 혁신을 통한 문제의 해결보다는 현 상태의 유지를 택했다. 이에 율곡의 비판은 재상을 향했다. 왕조 사회에서 재상이 할 일은 국가 정책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왕을 옳은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때로는 국왕과의 의견 충돌도 불사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재상은 그저 국왕의 명령을 따르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으며, 보신에만 급급했다. 그리하여 율곡은 그들을 '유속(流俗)'이라 불렀다. 시류에 영합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자들이라는 의미였다. 입으로는 개혁을 외치지만, 실상은 실천 의지가 없는 '사이비(似而非)'라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들이 언제든 개혁 인사들을 쫓아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달리 예리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던 율곡은 생애 내내 그들에 의해 또 사림이 화를 입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같은 편이라고 간주했던 개혁 세력 내부에서도 개혁의 우선 순위와 방향을 둘러싸고 율곡과 생각을 달리하는 부류가 나타났다. 훗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동인이라 불리던 자들이었다. 국왕 선조에게 폐법(弊法)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요청했던 율곡과 달리, 그들은 국왕의 자기 수양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각종 세금 제도의 개혁을 통한 민생의 안정부터 이루고자 한 율곡과 달리, 그들은 향약(鄕約)을 통해 백성을 교화할 생각부터 했다. 율곡이 보건대, 아직 개혁 인사들이 확실하게 집권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욕만 앞선 그들의 성급함은 반대론자들에게 공격의 구실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 결과 오히려 개혁의 시계를 뒤로 돌릴 수도 있었다. 율곡은 이런 그들을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의미로 '우활한 선비(迂儒)'라고 지칭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혁을 완수하기는 어렵다. 반대가 더 많기 때문에? 아니다. 개혁을 말하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넘쳐난다. 문제는 그 중에 진심으로 개혁을 원하는 자는 얼마나 되는가다. '사이비'가 넘쳐나고 그들이 힘을 가질 때, '진짜'는 탄압받고 쫓겨난다. 개혁의 목표가 없기 때문에? 아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개혁의 이상(理想)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관건은 얼마나 현실에 기반해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세우는가이다. 커다란 구호만 있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실천 전략이 없을 때, 외침은 공허해지고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16세기의 율곡은 21세기의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개혁의 성공 조건으로 알려준다.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악마는, 아니 개혁의 천사는 디테일에 있다'.

김경래 전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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